오늘 말씀 (왕상8:54-66)을 보며 내가 온 마음을 다 드릴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고백하게 되었다.
(왕상8:61) "그런즉 너희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 완전하게 하여 오늘과 같이 그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지어다"라고 말한 솔로몬과 그 모든 백성이 이만 이천마리의 소와 십 이만 마리를 희생제물로 드렸음에도 솔로몬이 말년에 하나님을 떠났듯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관계없음을 본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을 본다. 구원 받은 자의 마음 또한 여전히 죄성이 남아있어 죄를 사랑하고 세상을 향해가는 마음을 막을 수 없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하나님을 사모하고 죄를 미워할 수 있는 이 마음을 구하길 원하신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이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고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겉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서 진실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을 자세히 보면 그 사람들도 다 본질적인 죄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삶에 간섭하셔서 죄를 짓고 있을 때 돌이키시고 그 사람들을 지켜주셨다. 주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기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믿음이 없어 이스마엘을 종을 통해 낳았지만 그럼에도 다시금 약속을 확인하게 하시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사라의 죽어있는 태를 여사 이삭을 낳게 하셨다. 그를 통해 아브라함은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받게 하셨다. 아브라함 스스로가 노력하였을 때는 결국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이스마엘 족속을 낳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끊임없이 약속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불가능하게 보였을 때 그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죽은 것에서 생명을 내신 것이다. 이삭은 자신이 에서를 사랑하여 야곱 대신 에서를 축복하려 하였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창25:23)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라 하셨는데 그것을 그 아내 리브가를 통해 들었었을 것임에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축복하려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에는 야곱이 그 약속을 받게 되었다. 그 것을 깨달은 이삭은 (창27:33)에 보면 "심히 크게 떨며"라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깨달았기에 그는 자신이 야곱에게 한 축복을 되돌이키지 않았다.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을 하나님은 사랑하셨다.(롬9:13) 왜?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택하심의 섭리다. (롬9:11)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하였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다: 행위가 아닌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아니다. 왜냐하면 (롬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다. 그 말은 즉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안에 계신게 아닌 시간밖에 계시기에(시간을 창조하셨기에) 야곱과 에서의 마음을 이미 아신 것이다. 에서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축복을 경히 여겼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25:34) 그러나 야곱은 어떠한가? 야곱은 속이면서까지 빼앗으려면서 까지 이 축복을 받고 싶어했다. 정말 믿음이 있었다면 속이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즉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축복을 쟁취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시나? 인간적인 방법까지라도 써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는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다 죄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자라게 하시고 믿음을 키워가게 하셨다. 자신의 모든 소망과 힘이 없어 끊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믿음을 주셨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신다. 이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 가신다. 그것을 보는 것은 내 삶에서 이다. 이번 학기에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주셨다. "내가 이런 것을 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이나, 하나님 제 마음을 주님께로 돌려주세요."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신실히 이 기도를 이루셨다. 그리고 이 기도는 나로부터 나오지 아니함을 고백한다. 정말 정직히 내가 어떤 죄를 범할 때 그 죄를 사랑하고 원하는 내 죄성을 고백하며 행위의 죄 하나 하나를 못 박는게 아니라 내 자신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이 죄들로 부터 날 멀어지게 하셨다. 물론 여전히 똑같은 상황이고 똑같은 유혹이 온다. 그러나 내 마음이 이 죄를 품으려 할 때, 주님께서 이것을 알게 하시고 주께 다시금 2000년전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이미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음으로 선포한다. 내가 그럼 이렇게 믿음이 있는 자 있가? 내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닌 내가 연약하기에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도 하나님께서 날 여기로 인도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신실하게 말씀을 이루시는 주님의 약속과 택하심을 따라 나를 택하시고 은혜로만 날 이 자리에 서게 하셨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나는, 우리는, 인간은 죄인이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다 잡아서 "자 이제 주님께 나아가자!"한다 해서 주께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주님으로 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오직 우리의 마음의 소유자 되시고 또 그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이루시고 나로써 이 말씀이 사실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하신다. 정말 그래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라 하는 것 같다. 나를 주님의 사랑에 가두시고 주님의 십자가에 가두시고 주님의 은혜에 가두시고 주님의 긍휼에 가두셔서 내가 생각하고 행하고 뜻하는 것을 꺽으시고 주님이 생각하고 행하고 뜻하시는 그 것을 내 마음에 부어주사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강권적이나 이것이 은혜다. 이것이 강권적이나 이것이 싫지가 않고 마음에 기쁨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이 완벽하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수 없이 죄를 지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중심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변치 않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정말 그리고 죄에서 자유한 삶이 주님을 사모하고 살다보니 되어있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솔로몬을 통해 모든 행위를 받지 않으시고 십 만마리의 제사보다 오직 이 모든 희생제물 대신 단 한 번의 희생제사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드려진 이 희생제사를 받으사 그 희생제사를 통한 죄사함을 믿는 그 마음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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